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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11. 6. 14:50 - artibass

2016년 11월 6일 연중32주일 감사성찬례 안내



2016년 11월 6일 연중32주일 감사성찬례 안내

 


<본기도>


생명의 근원이신 하느님,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을 이기시고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셨나이다. 비오니, 우리가 새로운 마음과 착한 행실로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며, 굳센 믿음으로 살아가게 하소서.  

 

전능하신 하느님, 주께서는 모든 좋은 것을 우리에게 베풀어 주시나이다. 비오니, 주님의 교회를 돌아보시고, 이 교구의 주교를 선출하는 우리 모두의 마음을 인도하시어, 주님의 백성을 돌보며 진리를 선포하고, 교회의 일치를 위하여 헌신할 충실한 목자를 얻게 하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1독서 : 욥기 19;23-27>


* 1독서는 욥기의 말씀입니다.

23 아, 누가 있어 나의 말을 기록해 두랴? 누가 있어 구리판에 새겨 두랴?
24 쇠나 놋정으로 바위에 새겨 길이길이 보존해 주랴?
25 나는 믿는다, 나의 변호인이 살아 있음을! 나의 후견인이 마침내 땅 위에 나타나리라.
26 나의 살갗이 뭉그러져 이 살이 질크러진 후에라도
27 나는 하느님을 뵙고야 말리라. 나는 기어이 이 두 눈으로 뵙고야 말리라. 내 쪽으로 돌아 서신 그를 뵙고야 말리라. 그러나 젖먹던 힘마저 다 빠지고 말았구나

 

* 이것은 1독서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께 감사합니다.


<시편 : 시편 17편>

 

1 이 몸의 죄없음을 밝혀주소서. 야훼여, 들으소서. 이토록 울부짖는 소리 모르는 체

  마옵소서. 이 애원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소서. 이 입술은 거짓을 모르옵니다.

2 "너는 죄없다." 판결하소서. 당신의 눈은 결백한 사람을 알아보십니다.

3 남들이야 무얼 하든지 이 몸은 당신의 말씀을 따라 그 험한 길을 꾸준히 걸었사옵니    다. 가르쳐주신 길을 벗어난 적이 없사옵니다.

4 나는 당신을 부릅니다. 하느님, 대답해 주시리라 믿사옵니다. 귀를 기울이시어 나의     말을 들어주소서.

5 한결같은 그 사랑을 베풀어주소서. 당신께로 피하오니 오른손으로 잡으시어 나를 치는    자들의 손에서 건져주소서.

6 당신의 눈동자처럼, 이 몸 고이 간수해 주시고 당신의 날개 그늘 아래 숨겨주소서.


*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아멘



<2독서 : 2데살 2;1-5, 13-17>


* 2독서는 데살로니카인들에게 보낸 둘째 편지의 말씀입니다. 


1 교우 여러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일과 그분 앞에 우리가 모이게 될 일에 관해서 부탁할 말씀이 있읍니다.
2 주님의 날이 벌써 왔다고 어떤 사람들이 말하더라도 여러분은 지성을 잃고 쉽사리 흔들리거나 당황해서는 안 됩니다. 아마 성령의 감동을 받았다는 사람이나 혹은 말씀을 전한다는 사람이 이런 말을 할지도 모릅니다. 또 우리가 이런 말을 편지에 써 보냈다고 떠들어 대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3 여러분은 아무에게도 절대로 속아 넘어가지 마십시오. 그날이 오기 전에 먼저 사람들이 하느님을 배반하게 될 것이며, 또 멸망할 운명을 지닌 악한 자가 나타날 것입니다.
4 그자는 사람들이 신으로 여기는 것이나 예배의 대상으로 삼는 모든 것에 대항하고 자기 자신을 그보다도 더 높이 올려 놓을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성전에 자리잡고 앉아서 자기 자신을 하느님이라고 주장할 것입니다.
5 내가 여러분과 함께 있을 때에 이런 일에 관해서 누차 일러 둔 일이 있는데 여러분은 그것을 기억하지 못합니까?
13 주님의 사랑을 받는 형제 여러분, 우리는 여러분을 생각할 때 언제나 하느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 없읍니다. 하느님께서는 누구보다도 먼저 여러분을 택하셔서 구원을 얻게 하시고 성령의 능력으로 거룩하게 해 주셨으며 진리를 믿게 하셨읍니다.
14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여러분을 구원하시려고 여러분을 불러 우리가 전하는 복음을 받아 들이게 하셨읍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받아 누리게 되었읍니다.
15 그러므로 교우 여러분, 굳건히 서십시오. 그리고 우리가 전한 말이나 써 보낸 글을 통해서 여러분에게 가르쳐 준 전통을 굳게 지키십시오.
16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고 은총을 베푸시어 영원한 위로와 좋은 희망을 주십니다. 하느님 우리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17 여러분의 마음을 격려하시고 여러분에게 힘을 주셔서 온갖 좋은 일을 하고 좋은 말을 할 수 있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

* 이것은 2독서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께 감사합니다.


 

<복음 : 루가 20;27-38>


* 성 루가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 주님께 영광을 드립니다.


27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파 사람들 몇이 예수께 와서 물었다.

28 "선생님, 모세가 우리에게 정해 준 법에는 형이 결혼했다가 자녀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형수와 결혼하여 자식을 낳아 형의 대를 이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29 그런데 칠 형제가 살고 있었습니다. 첫째가 아내를 얻어 살다가 자식 없이 죽어서

30 둘째가 형수와 살고

31 다음에 셋째가 또 형수와 살고 이렇게 하여 일곱 형제가 다 형수를 데리고 살았는데 모두 자식 없이 죽었습니다.

32 나중에 그 여자도 죽었습니다.

33 이렇게 칠 형제가 다 그 여자를 아내로 삼았으니 부활 때 그 여자는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

34 예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다. "이 세상 사람들은 장가도 들고 시집도 가지만

35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 저 세상에서 살 자격을 얻은 사람들은 장가드는 일도 없고 시집가는 일도 없다.

36 그들은 천사들과 같아서 죽는 일도 없다. 또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들이기 때문에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

37 모세도 가시덤불 이야기에서 주님을 가리켜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라고 불렀다. 이것으로 모세는 죽은 자들이 다시 살아난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38 이 말씀은 하느님께서 죽은 자의 하느님이 아니라 살아 있는 자의 하느님이시라는 뜻이다. 하느님 앞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살아 있는 것이다."  

* 이것은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를 찬미합니다.



<말씀묵상>   

 

 하느님 앞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살아 있는 것이다. 루가 20:38

 

 예수님 당시 사두가이파 사람들은 육체의 죽음과 함께 영혼도 소멸하기 때문에 부활도 없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반면 일부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부활을 현세에서의 욕망이 실현되는 지상적 삶이 연장으로 이해하였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부활을 믿지 않는 사두가이파의 믿음에도, 부활을 현세적 삶의 연장으로 받아들이는 바리사이파의 믿음에도 동의하지 않습니다. 복음이 증언하고 있는 부활은 당시 주류적 신앙에 도전하며 다른 차원의 삶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로는 고전 15:44에서 우리가 ‘육적인 몸으로 묻히지만 영적인 몸으로 부활’할 것이라고 하였고, 필립 3:21에서는 하느님께서 ‘우리의 비천한 몸을 당신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형태로 변화시키실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복음에서 ‘생명’이라고 말 할 때, 그 ‘생명’은 생물학적 생명을 뜻하는 ‘비오스’가 아니라 하느님의 생명을 뜻하는 ‘조에’입니다. 그런 점에서 복음이 증언하는 부활은 바로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하고, 하느님의 생명으로 살아가는 삶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생명을, 그 영원한 생명을 지금 여기에서 체험하며 살아갑니다. 오늘 서신말씀에서도 사도 바울로는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여러분을 구원하시려고 여러분을 불러 우리가 전하는 복음을 받아들이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받아 누리게 되었다.(살후 2:14)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사두가이파 사람들이 부활을 부정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그들이 중히 여기는 ‘모세오경’에 부활에 대한 언급이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를 잘 아시는 예수님께서는 출에굽기 3장 말씀을 인용하여 하느님을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삭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라고 말씀하시며 하느님은 죽은 자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살아있는 이들의 하느님’이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사두가이파들의 어리석은 질문에 답하시며 예수님은 그들의 관심을 복음의 본질적인 차원으로 전환시키고 있습니다. 부활신앙은 죽은 후에 결혼을 몇 번이나 할 수 있고, 아이를 낳을 수 있는지와 같은 현세적 삶의 연장선상에 대한 질문에 답하기 위한 신앙이 아닙니다. 부활신앙의 관심은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대답입니다.

 

 부활체험은 지금 여기서 주님을 보고, 듣고, 만지고, 느끼는 체험입니다. 부활체험은 죽은 이후에 경험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매일의 일상을 살아있는 예수님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며, 지금 여기 살아계신 예수님을 경험하는 체험입니다.

 

성찰을 위한 질문

 

요사이 당신은 당신의 하느님을 언제, 어디서, 어떻게 만나고 경험하고 있습니까?


 

<예배 / 공동의 기억과 정체성 - 성경의 이야기를 기억함(1)> 

 

 기억은 우리 정체성의 근원입니다. 우리의 가장 깊은 감성은 어떻게 기억하고, 무엇을 기억하는가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병에 시달리거나 사고로 기억을 잃은 사람들은 이런 정체성을 가질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개인적인 기억들을 심각하게 잃어버리는 것에 대해 두려움을 갖는 것은 당연합니다. 크리스토퍼 라치는 그의 책 ‘자기도취의 문화’에서 망각이나 감금이 개인적이고 심리적 문제만이 아니라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실재임을 서술하고 있습니다. 기억하는 능력이 없다면 우리는 삶과 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리스도교 예배와 기도와 삶에 있어서 근본적이라고 할 수 있는 기억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성경의 이야기들입니다. 우리가 하느님 앞에 열려진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구약의 역사와 이야기, 예언자들의 글,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부활, 제자들의 증언 그리고 오랜 시간을 거쳐서 공동체들이 해왔던 기도와 삶에 대한 확장된 기억들을 받아들일 것을 요구합니다. 어거스틴은 그의 ‘고백록’ 10권에서 ‘주님 나의 기억 어느 곳에 당신이 거하십니까?’라고 묻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기억해 주시기를 기도하면서 성령이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를 기억하도록 도와 줄 때, 우리는 과거가 급진적으로 현재가 되는 역설을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에 기반을 둔 신령한 예배 속에 ‘미래가 임하는’ 것으로 이러한 사건은 항상 인간 역사 속에 있는 신비와 고통을 통해서만 주어집니다.

 

 성경이 말하는 기억이라는 것은 인식에 자극을 주는 것 이상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에 있어서 예배의 중심요소는 ‘이스라엘을 기억하는 자’와 ‘하느님을 기억하는 자’ 사이에 움직임이었습니다. 하느님이 행하신 과거의 역사들을 예배라는 기념 행위 속에서 계속 되살아나게 하면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단순한 심리적 회상이나 희미한 역사적 투영을 넘어선 것에 몰두하게 됩니다. ‘야훼를 기억하라.’는 것은 함께 모인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공동의 정체성을 형성시켜 주는 근간이 됩니다. 창조 역사, 출에굽과 해방, 언약과 십계명, 예언자들을 통해 하느님이 역사하셨던 것을 되새기면서 이스라엘은 진실한 정체성과 목적을 새롭게 다짐하게 되었습니다. 출에굽 이후 많은 세월이 흘렀지만 이스라엘 공동체의 기억은 더욱 깊어졌고, 이것은 신명기에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신명기 저자는 이집트에서 약속의 땅으로 가기 위해 홍해를 건넌 적도 없고, 해방의 경험을 하지 못한 후대의 자손들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신명기의 쉐마는 ‘이스라엘아 들으라.’는 선포와 함께 제시됩니다. ‘우리 하느님 야훼는 오직 한 분 하느님이시니,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사랑하라.’ 는 계명에 대하여 자녀들이 물어 볼 때, 부모는 이스라엘의 구속역사와 전통을 되풀이하여 말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예배를 통해서 하느님을 만나도록 해야 하는데, 그런 의미에서 예배의 시간은 살아있는 하느님과 대화의 시간과 장소가 됩니다. 성경의 말씀을 토대로 기도하면 과거에 행하신 하느님의 역사와 말씀이 지금도 계속 된다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계속)